영풍 석포제련소 비소 중독 사고와 중대재해 시대의 경영 책임
산업현장의 위험은 반드시 불꽃과 폭발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어떤 위험은 냄새도 없고, 색도 없으며, 인간의 감각이 인지하기 전에 생명을 앗아간다. 경북 봉화군 영풍 석포제련소에서 발생한 비소 가스 중독 사고는 바로 그러한 '보이지 않는 위험'이 남긴 비극이었다.
2023년 12월 6일 경북 봉화군 영풍 석포제련소에서 근로자들이 비소가 포함된 유해가스에 노출되는 사고가 발생했다. 이 사고로 작업자 1명이 다발성 장기부전으로 사망했고, 직영 및 도급 근로자 3명이 중상을 입었다. 검찰은 산업재해 예방 의무를 다하지 않았다고 판단해 경영진과 법인을 기소했다. (연합뉴스)
이번 사건은 단순한 산업재해 사건이 아니었다. 중대재해처벌법 시행 이후 원청 대표이사가 처음으로 구속기소된 사건이라는 점에서 한국 산업안전 법제의 중요한 분수령으로 평가받았다. (연합뉴스)
1. 사고의 개요: 무엇이 잘못되었는가
영풍 석포제련소는 국내 최대 규모의 아연 제련시설 가운데 하나다. 아연 제련 공정에서는 광석 속 불순물을 제거하는 과정에서 비소가 발생할 수 있다. 특히 삼수소화비소(Arsine, AsH₃)는 극도로 독성이 강한 가스로 알려져 있다.
사고 당시 작업자들은 탱크 수리 및 모터 교체 작업을 수행하던 중 유해가스에 노출된 것으로 조사됐다. 작업 전 가스 측정이 적절했는지, 밀폐공간 관리가 이루어졌는지, 환기 및 격리 조치가 충분했는지, 작업허가제도가 실질적으로 작동했는지가 주요 쟁점이 되었다. (다음)
산업재해는 대부분 단일 원인으로 발생하지 않는다. 이번 사고 역시 여러 방어막이 동시에 실패한 전형적인 '스위스 치즈 모델'의 사례로 볼 수 있다.
위험성평가 미흡
유해가스 측정 실패
작업허가제 형식화
밀폐공간 관리 부족
원·하청 안전관리 미흡
현장 감독 부재
비상대응 체계 부족
사고는 현장에서 발생하지만, 원인은 조직 전체에 축적된다.
2. 비소는 왜 치명적인가
비소는 국제암연구소(IARC)가 지정한 1군 발암물질이다. 특히 삼수소화비소는 극미량 흡입만으로도 적혈구를 파괴하고 장기 손상을 유발하는 고독성 물질이다.
급성 노출 시에는 다음과 같은 증상이 나타난다.
호흡곤란
용혈성 빈혈
간·신장 손상
다발성 장기부전
사망
비소의 가장 무서운 점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독성물질 관리의 핵심은 작업자의 주의력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계측기와 시스템에 의존하는 것이다.
안전은 인간의 실수를 비난하는 체계가 아니라 인간의 실수를 전제로 설계되는 체계다.
3. 항소심 판결: 법원은 무엇을 판단했는가
2026년 4월 28일, 대구지방법원 형사항소3-2부(재판장 김성열 부장판사)는 영풍 석포제련소 비소 중독 사고에 대한 항소심 선고를 내렸다. 이번 판결은 중대재해처벌법 시행 이후 경영책임자의 안전의무 범위를 다시 한번 확인한 중요한 사례로 평가된다.
재판부는 박영민 전 영풍 대표이사와 배상윤 전 석포제련소장, 법인 영풍 및 도급업체 측이 제기한 항소를 모두 기각하고 1심 판결을 대부분 유지했다. 이에 따라 박영민 전 대표와 배상윤 전 소장에게는 각각 징역 1년 6개월에 집행유예 3년이 유지되었고, 법인 영풍에는 벌금 2억 원, 도급업체 석포전력에는 벌금 5천만 원이 확정됐다.
특히 이번 항소심에서 주목할 부분은 단순히 형량 유지에 있지 않다. 재판부는 일부 작업에 대한 기존 무죄 판단을 뒤집고 유죄 취지로 판단을 변경했다. 1심에서 유해물질 취급 작업으로 보기 어렵다고 판단했던 일부 모터 교체 작업에 대해서도, 비소 등 관리 대상 유해물질이 존재하는 설비에서 수행된 이상 산업안전보건법상 안전조치 의무가 적용된다고 본 것이다.
이는 유해화학물질 관리의 범위를 보다 넓게 해석한 판결로 평가된다. 근로자가 직접 화학물질을 취급하지 않았더라도, 해당 물질이 존재하는 설비나 공정에서 작업이 이루어진다면 사업주는 동일한 수준의 예방조치를 이행해야 한다는 법원의 메시지가 담겨 있다.
재판부의 판단은 결국 사고의 직접 원인보다 예방체계의 부재에 주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법원은 위험물질을 상시 취급하는 제련소의 특성상 사업주와 경영책임자에게 더욱 높은 수준의 안전관리 의무가 요구된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는 중대재해처벌법의 핵심 철학과도 맞닿아 있다. 중대재해처벌법은 사고 이후 처벌을 강화하기 위한 법이 아니라, 사고 이전에 예방 시스템을 구축하도록 경영책임자에게 의무를 부과하는 법이다. 따라서 법원이 묻는 질문 역시 "사고가 왜 발생했는가"에 머무르지 않는다. 오히려 "예방체계가 실제로 구축되고 작동했는가"가 판단의 중심에 놓인다.
영풍 석포제련소 사건은 이러한 사법적 흐름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산업재해의 책임은 더 이상 현장 근로자의 실수에만 머물지 않는다. 안전보건관리체계의 설계와 운영, 그리고 그 실행 여부까지 경영의 영역으로 편입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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